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에 호들갑이 연일 지속되고 있다.
이쯤 되면 한강 작가 자신도 민망스러운 상황이다.
학예회에서 상 탄 자기 아이를 자랑질 할 때 아이가 쪽팔려 하듯이.
문제를 비교해 보자면 2015년 쇼팽 피아노 콩쿠르에서 조성진이 우승했던 것과 이번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다르다는 점이다. 나는 조성진이 어떤 생각의 소유자인지 모르고 쇼팽 콩쿠르 심사자들도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저 생각 없이 잘 치면 된다. 또한 쇼팽 피아노 콩쿠르 우승으로 조성진의 피아노 실력이 최고 수준이라는 입증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문학 작품은 생각 없이 잘 쓸 수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상을 주는 자들의 입맛에 맞아야 된다. 그들의 생각의 테두리에 갇히게 된다. 노벨 문학상 평화상 경제학상은 이념적일 수밖에 없다. 레닌과 스탈린이 1·2차 세계대전을 종전시킨 공로로 전장에서 무수히 죽어간 인민을 대표해서 노벨 평화상을 받았더라면 인정. 도리어 아돌프 히틀러가 노벨 평화상 후보였으며 심지어 아프가니스탄 전쟁, 리비아 내전, 시리아 내전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비밀군사작전을 벌인 미 제국주의와 군산복합체의 하수인 버락 오바마가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들이 우리 정신세계의 기준이 될 수 없고 우리 문학 수준의 잣대가 되어서도 안 된다. 노벨 문학상은 스웨덴 한림원이 주관하며 수상자를 결정한다고 알려져 있으며 스웨덴은 아직도 왕국이다. 이러한 나라에 사는 자들이 문학에서 그들이 말하는 수상 기준인 이상(理想)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그냥 “너희 같은 인간들도 한강의 작품을 인정할 줄 아는구나.” 정도로 반응하면 좋았을 걸. 누가 상을 준다고 해서 그 문학 작품과 작가에 대한 평가를 달리 하며 유난을 떠는 그런 천박함에 휩싸이지 않았을 텐데.